
1. 무도가의 목표는 천하무적
세상을 둘러보았을때 '적'이라 할 많나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온화하고 너른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무도 수련의 목적이다.
천하무적은 어디까지나 무한소실점이다. 무적에 이르는 데는 전 단계가 있다. 바로 '적'이라는 개념을 갱신하는 것이다. '적'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적' 개념을 고쳐 쓴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적 개념을 최대한 확대하는 것이다. (...) 즉 대부분의 '적'은 '쓰러뜨리지' 않고도 그 '적성'을 해제할 수 있다. 우리는 '보다 복잡한 생물'이 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는 생물의 본성이기에 거역할 수 없다. 그리고 복잡해지기 위해, 쉽게 컨트롤할 수 없는 환경에 던져져, 자기 자신을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바꿈으로써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적 개념을 최대한 확대
2.진정한 생존 기술
완력이 뛰어난 개인이 주위를 위압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굴복시킴으로써 집단을 형성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그런 집단은 일정한 규모를 넘어서지 못한다. 공포나 폭력에 의해 혹은 이익을 내세워 통합된 집단은 다른 공포나 폭력이나 이익에 의해 쉽게 와해한다. 그런 연약한 집단은 수백, 수천의 병사를 말 그대로 '손발처럼' 움직이는 사람이 이끄는 집단, 다순의 사람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듯한 집단에는 결코 맞설 수 없다. 근골을 강화하고 운동신경을 단련하며 개인적인 신체능력을 아무리 높인다 해도, 혹은 무자비한 태도록 온갖 반기를 억누른다 해도, 다수의 인간이 저마다의 주체적 의사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하나의 신체의 각 부위처럼 통일성 있게 움직이는 집단에 맞설 만한 집단은 만들 수 없다.
3. 무도의 본질은 돌봄
무도의 요체 또한 타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늘리는 것
상대방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자연스런 질문과 날 것의 대답, 기계적 대화가 아닌 대화적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생활세계,이데올로기 등등 알아보고 그 사람에 대한 상상력 넓혀가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지각만을 바탕으로 세계를 기술한다면 엄밀한 것이 될 수 없다. '내 눈에는 세계가 이렇게 보인다'는 사실로부터 '세계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추론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은 지금 생생하게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망상일 수도, 체계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일 수도, 향정신성 약물의 효과일 수도 있다. (...) 즉, 내가 세계를 직접적이고 전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다(한정적인 일부만 경험하고 있다)고 인정하면, 그 대가로 나는 다양한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타아들과 공동주관적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현상학적 의미에서 볼 때 현상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바로 이런 상황이다.
거대한 '공동신체를 형성하는 힘' '현상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가 장수가 될 수 있었다
6. 교육은 배우는 자를 위한 일이 아니다.
올해 학생들의 특징은 '실무 지향'이다. 기업 경영 얘기를 택한 학생들이 많으며 그것도 아주 구체적이다. 고용 전략, 마케팅, 상품개발, 인터넷 쇼핑, 성공한 업태 등등. 얼마 전까짐나 해도 경제나 경영을 논할 때는 훨씬 추상적이었다고 할까, '위'에서 내려다보는 저널리즘 시점에서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졸업논문은 다르다. 모두 '현장에서 일하는 당사자' 시점이다.
비지니스 현장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금, 거기에 있다'. 학생들은 앞으로 반년 뒤에 거기서 일하게 된다. 비지니스 현장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가, 거기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다. 이는 학생들에게 실로 절박한 물음이다.
예전 같으면 '비정규직 노동자에 의한 고용 조정은 멈춰야 한다'거나 '여성의 노동환경을 정비하려면 돌봄 시설을 정비해야 한다' 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내는 식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생들에게는 '바른 답을 술술 써서 끝'을 맺기보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라는 원인을 묻는 것이 더 시급하다. 자본주의가 나빠서, 경영자가 부도덕해서 같은 포괄적인 결론으로는 사태가 크게 호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일반론으로 결론 내기 보다 자신들이 실제로 일할 때 '비교적 이치가 통하는 노동 환경'과 '전혀 이치가 통하지 않는 노동 환경'을 개별적으로 식별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아마 다들 가지고 있는 듯하다.
7.내셔널리스트와 애국
내셔널리스트가 되면 행사할 수 있는 구너리에 비해 부과되는 의무는 극히 적다. 그러니 오랫동안 소비사회를 살면서 소비사회의 감각을 연마해온 젊은이들이 상거래라는 틀에 준거해 '권리는 무진장 많고 의무는 없다시피 한' 내셔널리스트 옵션을 선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면, 애국자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을 사랑하고 자신이 현재 귀속된 집단의 수행력을 높이는 데에 마음을 쓰고, 이웃에게 경의를 표하며,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묵묵히 수행할 책임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그러한 '장소'나 '집단'이나 '이웃'의 수를 하나씩 늘려 가면서 머지않아 '국민국가'에가지 내가 귀속하는 집단을 확대해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가 애국자다.
8. 머리로 모르는 것은 몸에게 묻는다.
몸이 모르는 것은 머리에게 묻는다.
소급적 추리
분석적 추리
결과를 알려 주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를 밝혀내는 사고
가설에 대한 반증사례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지나간 과정'이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무딘 의미, 내 사고가 도저히 흡수할 수 없는 추가분으로서 생기는 여분, 완고하고 동시에 종잡알 수 없고 미끌미끌하면서 도망가 버리는 의미.
9. 내 몸은 머리가 좋다
나는 머리 좋은 사람에게는 무조건 경의를 품고 바보에게는 무조건 적개심을 품는, 구제하기 힘든 주지주의자다. (...) 자신의 욕망을 신속하게, 제대로 실현하려 할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성격이 좋고, 상냥하고, 배려심 있고,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 그것은 '우치다의 머리'는 '머리가 나쁘'지만 '우치다의 몸'은 '머리가 좋기' 때문이다. (...) 본인이 '바보'인 주제에 우치다가 늘 자신 있게 "그놈은 바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지성을 항상 '몸'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10. 브라콜뢰르의 마음가짐
신체기법에 관해 말하자면, 이치만 앞서고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실제로 신체능력의 발현을 막는 것은 대부분 뇌의 요인이기 때문이다. 몸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움직임을 훨씬 넘어서는 운동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안되는 이유는 뇌가 '인간의 신체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해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 물론 해제되었는지 여부는 실제로 도장에서 움직여 봐야 알 수 있다. 그 부분은 '가설의 제시 > 실험> 반증사례 출현> 가설 고쳐쓰기' 라는 자연과학의 진행 방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레비스틀의 <야생의 사고>는 전후 15년간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적 세계에 군림하던 '제왕'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왕조가 이 한 권으로 무너졌다. 이 책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구성된, 철저하게 통제된 책이었다.
배움이란 그것을 배우는 의미나 실용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배우면 언젠가 내가 살아남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선구적으로 확신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15. 절반은 단념하고 사는 편이 좋다.
진정으로 혁신적인 재능이 출현하면 그때까지 '옛 시스템'에 들러붙어 살던 수천 수만 명의 체면을 통째로 무너뜨리거나 실업으로 몰아넣어 버린다. 그러니 기득권이 그 출현을 방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인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재능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장래를 생각할 때 '이 사회는 내가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 유지될 것이다'라는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지금의 시스템 안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삶의 방식'을 찾는 아이들이 있다. 반면에 '언젠가 이 사회는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파국을 맞이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혀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를 '평상시 대응' 아이들과 '비상시 대응' 아이들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사실 양쪽 모두 자신이 선택한 '모드'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포기한다. '평상시 대응'을 선택한 아이들은 '만약의 경우'가 발생할 때 지금껏 구축해 온 지위와 명예와 재화와 문화자본이 한순간에 '종잇조각'이 되어 버릴 수 있는 리스크를 안고 있다. 반면 '비상시 대응'을 선택한 아이들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고자 지금의 시스템에서 사람들이 놓치 못하는 여러 가치를 포기한다. 어떤 파국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사상적 탐구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부귀'로워지는 것은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란, 지금은 별로 영리해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디로도 달아나지 않고 여기에 머무르는 이들이다. 미약하지만 그 나름대로 이치가 통하는 곳, 머무르면 기분이 좋은 장, 인간이 함께 살아갈 장소를 만들어 주는 이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19. 글쓰기와 무도 수련
무도 수련도 마찬가지다. 수련의 목표는 고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투시도법의 '무한 소실점'과 같은 것이다. (...) 무도에서도 몸이 먼저 말은 나중이기 때문이다. (...) 구체적인 것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비유적 표현에 의지해 '거기에 없는 것'을 사용해 몸을 움직이게끔 한다.
20. 양도체가 되어라
'양도체'란 다음 사람에게 최대한 정확하게 건네는 것을 목표로 파동을 수신하는 사람이다. 스승으로부터 수신한 파동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려면 '도체'로서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 그 기능이 약하면 모처럼 수신한 파동이 줄어들거나 오염된다. 즉 스스로가 항상 양도체로 작동해야만 한다.
'파동'이라는 말을 썼지만, 이 말 대신 어떤 말을 대입해도 된다. '사랑'도 좋고 '말'도 좋고 '돈'도 좋다. 이 세 가지는 레비스트로스가 '커뮤니케이션의 세가지 수준'이라는 표현으로 제시한 것이다. 친족, 언어, 경제활동. 이런 인간적 활동들은 모두 우리에게 '양도체가 되어라'라고 지시하고 있다.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주는 행위를 통해서만 손에 넣을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 혹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는 존재만을 '인간'이라고 부른다.
25.담력의 쓸모
'놀라지 않는 사람'은 어떤 역사적 사건에 의해 이 현실이 만들어졌고 어떤 우연에 의해 그 현실이 현실이 되었는지 찾아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즉 '놀라지 않는 사람'은 세계는 '이렇게 되어야 하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모종의 종교적 신빙성 속에 안주한다.
'놀라는 사람'은 우리가 '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을 살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현실과는 다른 현실도 있을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기에 눈앞의 현실에 '뭔가 좀 이상한데'라는 위화감을 느낀다. 왜 어떤 일을 일어나고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왜 없지?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이 놀라는 사람이다. 세상이 '지금과 달랐을'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그래서 분기점은 어디인지, 어떤 '일격'으로 말미암아 현실이 '이렇게'되고 '저렇게'되지 않았는지를 상상한다.
담력을 기른다는 것은 '위기에 임해 혼비백산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다. 우리가 학문을 연구하고 무도를 수련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담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이 현실과는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놓고 늘 상상력을 구사함으로써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되도록 많이 열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학술적 지성의 조건이다. 무도 수련에서는 '사활이 걸린 국면'을 상정하고 그럴 때 '심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판단력이나 신체능력은 어떻게 저하하는지'를 반복해서 시뮬레이션한다. 그리고 상상을 통해 그 가혹한 '능력 저하 시뮬레이션'에 몸을 익숙하게 만들면서 그런 국면에서 살아남는 기술을 학습한다. 놀라운 경험을 스스로 쌓아 감으로써 놀라지 않는 심신을 구축하는 것. 담력이 있는 사람은 멍하고 둔중한 사람이 아니다. 세계 질서의 갑작스러운 붕괴, 자신의 삶이 불시에 끝나는 것을 당연한 가능성으로서 항상 계산에 넣고 있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28. 불안의 쓸모
철학자의 '철학자성'이란, 필경 자신의 뇌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사유의 소멸과 생성을 정밀하게 모니터링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니까 '루틴 엄수'는 실제로 생명을 지키는데에도, 지적 혁신을 완수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후틴의 으뜸은 의례다. 거듭 말하지만, 그렇기에 가정은 의례를 기초로 구축되어야 한다.
부록. 합기도 상담실의 기상천외한 문답
아이들이 올바른 위치에서 올바른 순간에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려면, 선택할 수 있는 행동과 동선이 가장 많을 때 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생명력이 넘쳐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연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이나 가정 교육, 수행을 통해 비로소 습득되는 능력이라는 점을 꼭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옮긴이의 말
현명하게 결정하려고 애써 모으는 정보는 대부분 '과거'의 것이다. 거기에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낸 '문제'에 낑낑거리며 '대답'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후수로 밀리고 마는 것이다. 이럴 때 후수로 밀리지 않으려면 '먼저' 가설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가설을 보강/수정할 목적으로 정보를 모아야 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정보->가설->실행->검증'이 아니라 '가설->정보->가설의 재구축->실행->검증' 순서로 사고해야 현상에 '바람구멍'을 낼 수 있다.